[크리틱] 백원달 <인생의 숙제>

굳이 풀지 않아도 될 숙제들

<인생의 숙제> 백원달, FIKA


나를 바라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마주하는 것, 내가 미쳐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 기억을 뒤적이는 일은 고통스럽다. 백원달 작가는 여행을 테마로 한 웹툰과 단행본을 그려내는 작가였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시간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원달이 지난 작업인 <소녀가 여행하는 법>, <나 홀로 유럽>, <국내 유랑기>와 인스타그램에 연재한 <베트남프렌즈여행기>가 일상에서 벗어난 기록을 그린 작품이라면, <인생의 숙제>는 마침내 여행에서 돌아와 피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삶을 제한하는 설명서

우리는 삶에도 설명서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그 설명서는 ‘일반적’이라거나, ‘보통’이라는 말로 튀어나간 부분을 잘라낸다.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대학을 나와서 직장은 어떻게, 노후대비를 어떻게 하는지. 사실 이 삶은 좋은 삶일 수는 있지만, 나에게 맞는 삶일 가능성은 낮다. 인생이 맞는 부품을 찾아 순서대로 조립하는 프라모델이라면 설명서는 정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프라모델이 아니고, 순서도 없다. 시간은 선형이지만 경험은 선형으로 쌓이지 않는다.


<인생의 숙제>는 5년차 직장인 박유나를 통해 삶의 설명서가 끼치는 해악을 보여준다. 제목 <인생의 숙제>는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떠안게 되는 숙제와 같은 이벤트들을 계속해서 조명한다. 연애, 결혼, 육아와 같은 사적인 일부터 직장과 같은 공적인 장소에 이르기까지, ‘숙제’는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원달이 그리는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여성이라는 점은 굉장히 흥미롭다. 주인공 박유나는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월급은 스쳐 지나가고, 몇 년째 원룸에서 생활하며 제대로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운 삶에 처해있다. 격무에 시달리며 퇴근해서 집에 오면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다. 홍진숙 팀장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지만, 팀 내부에선 직원들을 괴롭히는 악질 상사로 통한다.


‘숙제’라고 할 수 있는 이벤트, 그러니까 결혼은 유나와 진숙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원인들이다. 3년간 사귄 남자친구는 결혼을 이야기하지만, 유나여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할 수 있을 때 만난 것이 유나이기 때문에 결혼하자고 이야기하고, 진숙은 그것이 자신의 커리어에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거부했다. 유나의 남자친구는 너무 쉽게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나의 친구들 역시 결혼과 육아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유나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그럼 ‘숙제’를 마친 사람의 삶은 어떨까? 유나의 선임 최미경 대리는 그림을 그렸지만, 일단 결혼부터, 일단 아이부터 키우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하다 이제는 그 좋아했던 미술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 받는다. 미경의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미경의 말에 바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말하고, 그 그림을 가장 먼저 샀다며 앞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응원한다. 미경은 유나에게 “정말 정말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건 행운”(p. 370)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 속에서 제시된 ‘숙제’로 고민하는 인물이 여성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제도가, 그리고 사회가 결혼과 육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개인, 특히 여성에게 마치 반드시 클리어해야 하는 게임 속 퀘스트처럼 떠넘겼기 때문이다. 백원달은 이 과정을 들여다보며 개인에게 책임이 부여되는 과정,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을 조명한다. 이렇게 개인에게 떠넘겨진 ‘책임’은 흔히 차별의 기제가 되곤 한다. 자신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에, 또는 미경의 말 대로 운이 좋아야만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설명서가 차별을 조장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의 불행은 나의 현재를 안심하게 만든다”(p. 109)는 말처럼 타인의 불행을 현재의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사회는 병들 수밖에 없다. 작품에서 백원달은 이들 여성들의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박유나, 홍진숙, 최미경이 ‘살아남기 위해’ 취했던 삶의 태도를 모두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인생’에 숙제를 던졌던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기에 맞춰 유나 역시 공모전, 결혼과 그에 따라오는 패키지들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다.



제약이 상상력의 무대가 될 때

이런 서사를 풀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백원달이 택한 연출은 꽤나 독특하다. 흔히 인스타그램에서 연재하는 만화들처럼 정사각형으로 된 컷 네 개 만을 한 페이지에 위치시켰다. 영문자 Z 모양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시선의 흐름은 자칫하면 독자들에게 지루함을 안길 수 있지만, 오히려 <인생의 숙제>라는 제목과 일상이라는 테마가 만나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나의 시’와 같이 시선을 환기할 수 있는 요소를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이 일정 분량을 읽고 나면 반드시 시선을 환기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백원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4컷만이 배치되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마치 4컷만화처럼 작품의 서사를 풀어내기 위한 연출을 선보이기도 한다. 특히 112페이지와 165페이지의 연출이 대표적인데, 자신이 부여한 제약을 오히려 독자들이 서사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다. 더불어 단조로운 컷 연출로 인해 서사가 함께 단조롭게 인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76페이지의 사례처럼 전체 페이지를 활용한 컷을 배치하기도 한다. 여기에 사용된 그림은 단조로운 4컷의 ‘일상’에서 벗어난 ‘비일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선보인 <인생의 숙제>는 언뜻 단조로워 보이는 연출을 통해 삶의 궤적을 그리고자 노력한 작품이다. 그 궤적을 통해 ‘일반적’, ‘보통’이라는 말로 없는 것처럼 여겼던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내 일상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럼으로써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숙제’였던 사건과 결정들이 사실은 선택의 문제였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이처럼 백원달은 일상 속 소재를 활용해 이야기를 건네는 작가다. <인생의 숙제>는 인생에 숙제처럼 다가오는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사건’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풀어내 흥미로운 연출과 함께 선보였다. 작품을 통해 ‘인생의 숙제’인 사건들은 왜 여성에게 더 가혹한지 묻는다. 우리는 그의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을까? 그동안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그 질문의 순간으로 넘어온 백원달이 연재를 준비중인 <화가 살리에르>을 기다리게 된다.

Text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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