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이루비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란다>

아이들은 함께, 또 따로 자란다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란다> 이루비, 낭만너구리


리뷰와 비평을 구분하는 방법 하나는 그 주관성을 전면으로 두는가 배면으로 두는가 하는 차이에서 올 것이다. 리뷰가 감상을 목적으로 필자의 개인적 읽기 경험을 부각하는 쪽이라면 분석과 해석, 평가를 다루는 비평은 (설령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가능한 한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주어와 시제를 지우곤 한다. 하지만 그 기술이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란다』를 논함에 있어선 제힘을 내지 못할 것 같다. 이 만화의 경우 오히려 주관적 경험을 부정하지 않을 때 좀 더 정확하고 온당한 비평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란다』는 일종의 일기 형식을 빌렸다. 목차는 비뚤하고 귀여운 손글씨 같은 글씨체로 날짜와 요일, 그날의 인상적이었던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고 이야기는 중학교 입학을 앞둔 소년 ‘영원’의 1인칭 시점을 통해 전개된다. 오늘 있었던 일들에 관한 지나칠 정도로 상세한 진술에 비해 감상은 짤막하게 끝나곤 했던 평범한 유년의 일기처럼, 만화는 2000년 1월과 2월 사이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꼼꼼히 그려낸 뒤 영원의 단상을 덧붙이는 구성을 취한다. 동생과 티격태격한 일, 같은 반 ‘채섭’의 집에 놀러 간 일, 한밤중 놀이터에서 ‘미선 누나’를 만난 일, 중학생 형들과 어울리다 실수로 창고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엄마를 경찰서에까지 오게 한 일. 매일같이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과 비교적 크고 강렬한 사건들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진폭을 바꿔가며 전개될지라도 유년의 며칠은 서사보다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란다』는 지나간 시절인 2000년의 찰나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설명될 수도 있다. 유년기를 그려냈지만 ‘회고(回顧)’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그때의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도 고스란히 복원해 그냥 지금 그곳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2000년에 필자는 여섯 살이었으므로 주인공인 열네 살 ‘영원’보다는 8살이 적고, 영원의 동생 ‘영찬’보다도 3살이 적었던 셈이다. 2000년 당시에는 미취학 아동이었던 것인데, 영원처럼 학교에 다니고 스스로 문구점을 오갈 수 있게 된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만화에 그려진 문화 대부분은 그대로였다. 위화감을 느끼기는커녕 생생히 공감하며 만화가 복원한 시공간에 입장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 경험의 교집합이 내가 이 비평에서 주관성을 드러내는 이유다.


휴대전화 하나면 녹음, 사진 영상 촬영, 인터넷 업로드까지 가능한 지금에 비해 남아 있는 ‘사료’가 많지 않은 시절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구현했을까. 보면 볼수록 감탄이 인다. 지금도 타일인지 벽돌인지 확신이 안 서는 하얀 건물 외벽, 조악한 색깔의 간판들, 빵과 후랑크 소시지를 굽는 기계, 포켓몬빵과 띠부띠부씰, 구멍가게의 단출한 선반 위 먼지 쌓인 국간장, 델몬트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 동생과 세트로 사다 주셨을 윗도리(꼭 불만스럽게 입곤 했던). 그게 추억 비슷한 것이 될 줄도 모르고 무심코 배경으로 넘겼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밟힌다.


상황과 대사의 구현 역시 농도 높은 사실감을 들려준다. 동생 영찬이 자기 몫의 과자를 먼저 먹어버린 뒤 조금만 달라고 보채는 장면이나 심부름 가는 영원에게 영찬이 과자를 부탁하는 장면, 엄마와 말다툼하는 장면 등 생활감이 강한 일상의 장면일수록 어릴 적 보고 듣고 말했던 모습 그대로다. 형한테 과자 보채는 일이 신통치 않을 때는 반드시 엄마가 호출된다(“엄마~! 형아가 과자 안 줘~” “영원아 동생 과자 조금만 줘~”). 심부름을 부탁하는 일은 언제나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한 겹겹의 형태였고 말이다(“포켓몬 빵 사와. 고오스 초코빵! 그거 없으면 피카츄 땅콩크림빵, 그거 없으면.. 포켓몬빵 아무거나.”). 만화를 읽다 보면 어릴 적 ‘우리’ 집, ‘우리’ 동네 풍경으로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보편적인 것이었나 확인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가 드물었던 시절에도 이상할 정도로 흡사했던 삶의 면면이 이제 와 반갑고도 새삼스럽다. 한 시절을, 한 세대의 유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한 기록을 들춰보는 일은 또 어떤 의미가 있나. 그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았던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이제 촌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듯하지만, 사실 그리움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좋음의 주어에 언제나 모두가 해당할 수는 없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말이다.


전개는 영원의 시점에서 이뤄지지만, 그 시선 안에 잡힌 다른 아이들의 유년을 묘사하는 일에도 이 만화는 영원의 것만큼이나 성실하다. 영원의 동급생 채섭과 이웃에 사는 미선 누나 등이 그 주인공이다. 영원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고 있고 넉넉하지 않은 경제적 형편이 어쩔 수 없이 늘 불만이다. 채섭의 사정은 영원과 정반대다. 형편은 넉넉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고, 일로 바쁜 아버지는 출장이 잦아 채섭은 곧잘 집에 혼자 남겨진다. 없는 형편에 동생과 뭐든 나눠야 하는 상황이 불만스러운 영원과 달리, 외로워하는 채섭에게 동생과 엄마의 존재는 부러운 것이 된다. 미선 누나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고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미선 누나는 영원에게 부부 싸움할 부모가 없어 부러워하지만, 그래도 영원은 ‘부, 모’가 있는 미선이 부럽다.


이 만화를 읽는 독자 중 누군가는 주인공 영원에게 매끄럽게 이입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채섭이나 미선의 사정에 더 공감했을 수 있다. 반복되는 익숙한 퀼트처럼 유사한 삶의 풍경조차 깊이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공동의 기억을 다룰 때 유의해야 할 부분인데,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자란다』는 놓치지 않고 다뤄주고 있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공유했다고 믿었던 시공간이 사실 완전히 같지는 않았을 수 있고, 만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 그 시절을 지난 뒤의 기억 역시도 저마다 다른 형태로 주조됐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만화에는 투박할지언정 일기나 앨범보다는 ‘창고’나 ‘낡은 다락방’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특별한 첨언 없이 다만 그때의 기억과 소품들을 고스란히 보관해둠으로써 ‘그 시절’이 좋았는지 나빴는지에 대한 판단은 이후의 ‘나’들에게 맡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도 대단할 것 없던 세기의 시작에 유년을 보냈던 이라면, 그 세기의 5분의 1을 훌쩍 지나온 지금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어진 이라면 문을 열어봐도 좋지 않을까. 익숙하면서도 새삼스런 풍경이 오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Text 최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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