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이곤 <만남 노래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억

<만남 노래방> 이곤, 종이로만든책


추억은 무의식의 가장자리에 잠들어 있다가 의식의 영역에서 깨어나는 기억이다. 의식의 영역은 우리가 삶을 만들고 살아가는 심리적 장소이며, 우리는 그곳에서 또다시 추억이 될 것들을 만든다. 하지만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가 가공된 기억인 추억은, 다시 의식의 영역에 소환될 때에는 여지없이 각색되어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다시 각색된 추억으로 남는다.


추억을 각색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가공하곤 한다. 기억과 추억의 중심에는 ‘나’를 두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관적인 시선으로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시 추억으로 가공한다. 이곤의 <만남 노래방>은 기억이 추억이 된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2020년의 시선으로 본 1990년대

<만남 노래방>의 주 무대는 주인공 소라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만남 노래방’이다. 지하 1층에 자리잡은 노래방은 실제로 작가 이곤의 부모가 운영했던 노래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박소라는 작가의 어린시절을 대변하는 페르소나다. 처음엔 사람이 없던 노래방은 ‘서비스를 많이 준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말하자면 ‘가성비 좋은’ 노래방으로 소문이 난다. 그리고 이름처럼 ‘만남 노래방’은 만남의 공간이 된다. 작가는 이를 두고 ‘외로움을 달래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영등포에 위치한 노래방이 아이에게 안전한 공간일 리 없다. 작품 속에 끊임없이 ‘별것 아닌’ 것처럼 등장하는 요소들은 결코 아이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노래방 홍보를 위해 틀어 놓은 영상부터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만남의 공간’ 노래방에 찾은 손님들은 주로 중고생이었는데, ‘담배를 피우고 침을 아무렇게나 뱉는’(p.11) 이들이었지만 소라는 ‘싫지 않았다’고 말한다.


소라의 부모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래서 꽤나 충격적이다. 소라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노래방 좀 가보라’고 한다거나,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가 카운터를 보게 맡기는 장면들이 나온다. 2021년에 보기엔 생경한 장면이다. 이 작품은 2020년에 그려졌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꾸러기 수비대>(KBS 2TV에서 1996년 방영)의 주제가를 보면 1996년경을 배경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중반, 영등포의 풍경은 아이들에게 가혹한 환경이었다. 작가는 가감 없이 이런 부분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처한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작품의 밝은 색채와 그림 때문에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장면들을 배치해 둔 점이 눈에 띈다.


<만남 노래방>은 지난 세기의 일을 그리지만, ‘1990년대 초반’이라고 설명한 것과 많은 부분이 어긋난다. 노래방 개업 초기에 소라가 <꾸러기 수비대> 주제가를 불렀다면 1996년 이후여야 한다거나, 1990년대에 ‘존좋’처럼 2010년대에 유행한 말들이 사용(p.92)된다거나, 중학생이 휴대폰을 사용(p. 89)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기억을 혼동해 추억하곤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의 이런 ‘실수’가 의도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주체성을 빼앗긴 주인공의 자기연민

<만남 노래방>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은 바로 주인공이 그려지는 방식이다. 사건은 굉장히 구체적인 데 반해 주인공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소라의 지갑을 건드린 같은 반 미현이가 언니 미희에게 ‘지갑을 안 훔쳤는데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다’고 말하고, 그 언니가 소라와 친구들을 때리고, 다시 소라가 아르바이트 언니에게 말하고, 언니가 미현의 언니와 친구들을 혼내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에 이어 미현과 미희가 소라에게 ‘폰팅’을 시키는 장면에서도 소라가 느꼈을 감정은 ‘왜 웃지?’ 한마디로 정리된다.


더군다나 소라가 주체적으로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시점이 되면, 작가는 여지없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연출상에서 일부러 소라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장면이 반복된다는 점은 주인공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때렸던 미희와 교실에서 만나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소위 일진들이 자신의 집에서 멋대로 행동하는 상황에서도 작가는 적극적인 소라의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작품 속 주인공 박소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타자화된다. 소라는 ‘현재’를 사는 내레이션 속 인물의 추억을 재생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는 점은 작가가 후기를 통해 밝힌 ‘노래방의 소외된 사람들’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라의 공간을 침범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소외되었다’면, 작품 속에서 소외된 소라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건의 당사자인 소라의 목소리가 배제된다는 점은 <만남 노래방>이 가진 가장 큰 아쉬운 점이다. 구체적인 사건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인물만이 남는다.


따라서 후반부에 소라가 아르바이트 언니에게 “언니 때문에 나만!!!”(p.96), “언니 때문에 왔는데, 언니가 없어서 다 우리 집에 왔잖아! 선생님한테 혼나고 친구도 못 사귀고 나만 힘들어!”(p.97) 소리치는 장면은 당황스럽다. 사건에 반응을 보이지 않던 소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가진 순간, 독자는 소라가 가진 갈등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소라의 감정을 처음 만나게 된다. 갑자기 감정적으로 ‘급발진’ 한 소라를 뒤로 한 채, 작품은 내레이션으로 넘어가 마무리를 향해 간다. 여기서 우리는 추억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레이션에서 소라는 원망을 멈추게 될까 봐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언니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작품 속에서 사라진다. 작품 마지막에서, 언니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내고도 노래방에서 언니를 추억하는 모습은 지독한 자기연민과 위선을 담고 있다. 마치 우리가 자기연민으로 추억을 완성하는 것과 닮았다.


<낭만 노래방>은 이곤의 첫 작품이다. 작가의 말 대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작품에 스치듯이 등장하는, 일상의 모습들이 더 소중하다. 아이들이 단란주점 전단지로 딱지를 접는다거나,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 청소년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 안에는 주인공 소라도 살아간다. 작가는 이런 내용을 그리면서도 작품을 밝은 톤으로 채색하고, 검은색 대신 개나리색으로 모든 칸을 그렸다. 의도적으로 검은 선을 배제해 서사의 어두움을 희석한다. 마치 우리가 기억을 추억으로 각색하는 것과 같다.


이곤은 후기에서 “노래방 딸래미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즐거웠고 때로는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만남 노래방>이 보여주는 톤은 우리가 힘든 기억도 ‘그땐 그랬지’ 하면서 추억할 수 있게 되는 이유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작가 이곤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찾아가는 작가 이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찾게 되길 기다린다.

Text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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