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최성민 <PURIFYING F>

Purifying F

<퓨러파잉F> 최성민, 만화세계


Purifying Feeling

존재감 강한 필터를 씌운 사진처럼 대상을 재창조해낸 그림을 볼 때면 그 화풍이 독특할수록, 현실과 이질적일수록 그린 이의 시선이 궁금해진다. 대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래 이런 그림이 나온 것일까? 자기 그림체가 뚜렷한 이는 일상의 장면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감각할까? 남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빛을 인지해내고 볼 수 없는 선을 발굴해내는 이들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는 것들을 매 순간 어떻게 감각하는지 엿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Purifying F』는 그 ‘엿보기’가 화가보다는 만화가를 통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화는 서사를 풀어내기 때문에 그림은 고정된 한 장면이라기보다 시공간으로 기능하게 되고, 독자는 서사를 매개로 그 시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서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무난하고 유려한 그림체가 몰입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Purifying F』의 그림은 무난함과는 거리가 멀다. 곡선이 많기는 하지만 유려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서사를 감상하는 데 그림이 방지턱이 되어 눈을 멈춰 세우고, 그리하여 감각은 서사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으로 작용한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스크린 톤과 선의 사용이 색채의 자리를 대신해 만화의 지면을 꽉 채우고 있어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고 화려한 색으로 그려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복잡함으로 그려낸 ‘경계 없음’이다. 유심히 살펴볼수록, 단지 선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 그 의미가 한층 복잡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지에서부터 드러난다. 외피가 벗겨진 손은 언뜻 보면 망가진 신체 같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뼈가 아닌 기계다. 혈관처럼 보이는 것은 전선일 것이다. 하지만 전선은 꽃과 연결되어 있어서 줄기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 중 일부는 지면 밖으로 한정 없이 뻗어 나간다. 표지 뒤편으로 넘기면 줄기, 혈관, 혹은 전선이었던 무엇이 인물의 코와 입으로 스며들어 가거나 빠져나와 연기처럼 보이는 듯하다.


핵심은 이것이 표지의 일러스트에서 그치지 않고, 내지의 서사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다리 위를 건너는 버스 위에서 죽음을 망상하는 ‘나’를 뒤덮은 강물의 물결은 장례식에 놓인 향 연기로 이어지고 이내 구불거리고 추상화된 무늬처럼 인식돼 배경이 된다. 기체와 액체와 고체, 망가진 것과 뻗어 나가는 것, 떠내려가는 것과 피어오르는 것, 망상과 현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그림을 통해 아직 서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가 형성된다. 공상적이면서 어딘가 그로테스크하다. 하지만 만화의 시공간이 되는 것은 약간의 미래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사실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다. 다리 위의 버스, 미세먼지가 가득한 차창 밖의 하늘, 건물 안팎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비롯한 잡동사니들. 익히 봐왔던 도시의 모습이 새로운 것은 대상 자체보다도 독특한 그림으로 인해 깨어난 감각 때문일 것이다.




Purifying Future? or unFairness

사물과 사물 사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그림 그대로, 이야기 역시 ‘나’의 망상과 실재 사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채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 근 미래 국가는 환경 오염이 심각해 이미 “10년 전에 망할 운명”이었으나 과학 기술을 통해 가까스로 존속되고 있다. 그 과학 기술이란 것이 바로 정화조 ‘퓨러파잉 F’다. 멸망에 다다를 만큼 오염된 도시의 하늘이 이 정화조를 통해 ‘좋은’ 대기 상태를 유지한다. 퓨러파잉 F가 없으면 인류에게 미래 또한 없는 상황이니 그런 의미에서 퓨러파잉 F는 미래(Future)를 정화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구가 정화해내는 미래가 결코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퓨러파잉 F는 적합자인 인간을 재료로 사용해야만 가동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퓨러파잉 F에 ‘충분히’ 쓰인 인간의 신체는 완전히 망가져 엉망이 된다. 그러니까 퓨러파잉 F가 정화해 일구어내는 미래란 가혹히 희생당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더 정확히는 그들로부터 착취해낸 시간인 것이다. 사용을 다해 버려진 피해자의 시체는 페이지를 넘겨도 잔상이 계속될 만큼 끔찍한 몰골이다. 남겨진 피해의 흔적이 티 없이 맑아진 하늘과 대조되며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존속되는 미래란 과연 온당한 것인가? 


만화는 설정의 몇 가지를 극한값에 배치해 질문을 좀 더 선명히 한다. 정화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당장이라도 망할 위기에 처한(정확히는 진작부터 망했을) 상태라는 것. 전체 인구수와 비교해 아주 소수의 몇 명만 희생한다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소수는 ‘보육원 출신의 주식 폐인’이나 ‘똥인지 오줌인지도 분간 못 하는 한심한 인생’, 그러니까 ‘아마도 남들보다 목숨값이 가벼울’ 이들이라는 것. 다만 희생된 이들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신체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정화조의 재료로 사용돼야 한다는 것. 이런 전제 아래에서 묻는 것이다. 퓨러파잉 F의 가동은 과연 ‘가성비 좋은’ 혁신인가 혹은 반인륜적인 잔학 행위인가? 


설정값이 극단에 놓여 대답하기 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 값을 조금만 낮춘다면 『Purifying F』가 그려낸 미래 사회는 더는 가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오염된 대기나 버려진 쓰레기들, 의무적으로 착용하는 마스크 같은 이미지들만큼이나 기시감이 드는 것은 만화 속 세계를 지탱하는 ‘미래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시스템’이다. 퓨러파잉 F의 피해자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세상은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알았더라도 모른 척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영토의 주변부에 세워진 발전소의 전력이 중앙으로 함몰돼 흐르는 것처럼, 대개 인류는 발전의 수혜와 오염의 피해를 부당하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익숙한 일상의 시공간을 새롭게 감각하는 와중에, 그 안에 그려진 서사가 ‘근 미래’라는 것은 꽤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심상한 일상 속에서 죽음을 상상하던 ‘나’처럼, 희뿌연 시야 속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현재에서 종말에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언젠가부터 당연해졌던 오염된 현실과 은밀하게 기울어져 있던 불공정한 현실이 문제적인 것으로 재인식된다. 그런 의미에서 『Purifying F』는 공정함(Fairness)에 대해 점검하는 이야기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염과 불공정에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며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정말 괜찮은지 현재를 향해 묻고 있다.

Text 최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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