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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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 개개인에겐 이상하도록 기억에 남아 평생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살면서 비슷한 순간을 반복적으로 만난다고 해도 유독 그때의 그 일들만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에 평생 부유하며 맴도는 기억들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한두 마디의 말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사람과 말 모두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 때문일 수도 있는데 가끔은 그 기억들이 아프거나 부끄러워 먼 훗날까지 쫓아와 사람을 휘청이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이런 기억들. 우린 언제쯤이면 이런 기억들로부터 좀 더 희석된 감정들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 황벼리 작가의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는 그런 기억 속 주인공이 과거를 넘어 현실에 직접 마주했을 때, 내가 그동안 얼마나 그 기억들에 익숙해지고, 잊히거나 무덤덤해질 수 있는지를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를 빌려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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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이라 불리는 장르(또는 형식)는 북미코믹스 80년대 중후반기부터 많이 활용되었는데, 대표작으로는 앨런 무어의 [왓치맨(1986)]이나 프랭크 밀너의 [배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1986)] 같은 작품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북미 만화 시장의 족쇄였던 '코믹스코드'라는 검열 때문에 점점 유치해져 버린 만화판 전체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기에 상업성과 작품성 등을 이유로 그래픽노블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데, 큰 특징으로는 주인공의 정말 긴 독백 혹은 방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진지하고 진심이 담긴 나레이션에 있다. 정말 소설 안에 삽화를 넣은 듯한 느낌의 그래픽노블은 만화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사건들 앞에서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는 주인공의 거칠은 생각들을 컷의 내용과 대비한 글로 보여주고 또 어느 정도 기존 만화의 형식에 변화를 가져간다는 특징이 있는데 황벼리 작가의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는 그런 그래픽노블의 개성에 적확한 작품이었다. 실제로 2019년 1월 24일 팟방에 업데이트된 '만화 그래픽노블 덕후 방송 오감수다'에 출연했을 때도 그렇고, SideB에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를 입고하는 과정에서도 황벼리 작가는 '그래픽노블'이라는 단어를 자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런 면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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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의 1장은 학창시절 김갱이라 불렸던 주인공 김현경과 그 시절 같은 이름 때문에 양갱이라 불렸던 동창 양현경이 8년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변할 수 없는 지난 기억들을 추억으로 나누는데, 그것이 앞으로 점점 변해가는 오늘 혹은 내일의 삶과 대조를 이루어 연출되고 그사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는 김갱의 속마음이 나레이션으로 극을 채워 나간다. 그리고 2장은 이런 과정을 통해 더욱 깊은 곳에서 떠오른 김갱씨의 초등학생 시절의 일화가, 3장에선 김갱씨가 들려주는 인형극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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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기억이라는 인식의 틀 속에서 이미지를 찍어내며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큰 의미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학창시절, 성장기의 기억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평생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그때의 안 좋은 기억들은 바쁘고 지친 오늘과 내일 사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새벽을 불현듯 뒤척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변할 수 없는 과거이기에 거의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과거의 일임을 받아들이고 강해지거나 아니면 점점 희석해나가며 무덤덤해지는 길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갈래의 색을 가진 길이 존재하는 것 같다.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는 그중에 한 갈래를 평소 우리가 읽은 만화의 형식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연출로 풀어내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행복한 정답'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답'이 존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에 태도와 입장을 걸어두면 그것에 걸맞은 형태의 삶을 제시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 모두도 그러기 위한 자신만의 답을 찾으며 살아가는데 요즘 따라 그 과정의 무게가 더해져 힘들다면 황벼리 작가의 그래픽노블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를 추천한다. 이 예술작품은 분명 그것에 대해 도움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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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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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성인수

Photo. 황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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