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산보


산책을 읽는 시간

서사가 있는 만화는 뒤 내용이 궁금해 얼른 뒷장을 넘기게 하는 반면, 순간을 포착해 건져 올린 만화는 하나의 장면에 눈길과 마음을 머물게 한다. 어떤 날의 산책은 기온과 습도, 명도와 데시벨이 너무나 완벽해서 오래오래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때로는 만화를 읽는 일이 그렇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까워지는 집이 아쉬워 일부러 돌아가는 산책처럼, 휘리릭 한 번에 읽고 나서도 짧은 지면의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며 여운을 음미하게 된다.


<산보>는 제목 그대로 산책의 순간을 담아낸 만화다. “밤 산책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말로 시작해 동네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풍경들을 눈에 담는다. 오묘한 자판기, 새침한 고양이, 밥 냄새가 풍겨오는 집, 자재가 쌓여 있는 공사 현장, 그림자 진 가로수 같은 것들. 상관없어 보이는 취향을 공통으로 묶는 것은 이것들이 낮에는 눈에 띄지 않던 조용하고 사소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산란하는 낮에는 미처 발견할 수 없던 것들이, 빛과 소음이 가라앉은 밤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밤 산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흰 그림과 까만 배경의 색채 대비가,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밤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단순한 연출이 밤의 본질과 닮아 있어선지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밤 산책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한 편의 산책을 읽는 때와 방법은 제각각일 수 있겠는데, 나의 경우 낮에 한 번 읽고 같은 날 밤에 한 번 읽었다. 낮에 읽으니 밤 산책을 가고픈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는데, 막상 밤이 되니 겁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직접 산책을 가는 대신 만화를 한 번 더 읽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컴컴해진 창문이 만화를 채운 먹색과 같아서인지 몰입이 더 잘 됐다. 평소 산책을 할 때 음악을 듣는 편이라 내친김에 배경음악도 추가해 들었다.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아서 피아노곡으로 편곡된 유재하의 앨범을 틀어놓고 읽으니 상념과 운치가 적절히 뒤섞여 오묘하고도 애틋한 기분이 되었다. 밤 산책을 할 때면 찾아오는 바로 그 기분이었다.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저마다 확고한 요령과 취향이 있을 것이다. 각자만의 방법을 동원해 잠시 산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은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Text. 최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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