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최성민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

상상과 현실의 경계, 지면에서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 최성민, 만화세계


최성민은 꽤나 흥미로운 작가다. 작품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구체화해 추상적인 의식과 현실의 경계를 포착해내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펼친다. 그동안 최성민은 주로 SF적 상상력을 통해 주인공과 세계의 관계로 현실과 의식의 경계를 그려내곤 했다. 최성민의 작품세계는 최근 부천국제만화축제 독립만화 특별전에서 <2090 카운셀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성민의 작품이 다루는 의식과 현실의 경계는 타자에겐 명확하지만, 의식의 주체인 ‘나’에게는 추상적이다. 때문에 최성민의 작품을 읽는 타자인 독자에겐 분열적이고, 난해하게 읽히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 개념과 닮아 있다. 만화세계에서 펴낸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은 최성민이 본격적으로 ‘불안’을 다루는 작품이다. 불안은 아주 가까운, 하지만 멀리하고 싶은 존재다. 특히 불안은 현실과 의식의 경계에서 피어나고, 최성민은 그 경계를 다루는 작가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주제였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완벽히 공유할 수 없는

흔히 불안의 시기, 혼란의 시기를 다룬 작품들은 ‘아름다웠던 시절’로 각색하거나, 벗어나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그리곤 한다. 각색과 치유를 하는 동안, 작가는 화자와 오히려 멀어진다. ‘아름다운 것’,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는 말은 결국 내 것이 아닐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타자화된 불안’이라는 아이러니는 작가에겐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소재인 불안을 주인공에게 떠넘기고, 독자에겐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불안을 관찰하는 상황을 보여주도록 강제한다. 결국 불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난다. 대리체험이라는 의미에서 불안은 매력적인 주제지만, 독자 본인이 겪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 아이러니는 제대로 불안을 표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건 상상력이 가지는 한계기도 하다. 상상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물리적 공간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출판된 종이 위의 지면(紙面)에 옮겨진 작가의 상상력은 그 안에 갇히고,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의 배경이나 상황 역시 작가와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통해 완전한 소통을 그려볼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 그것을 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벽한 순간을 위한 여행>은 한참동안 불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불안을 다루기 위해, 작가는 자신이 작품 안으로 침투한다. 작품 속으로 침투해 남지와 작가가 의사소통하는 모습은, 제4의 벽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작가는 남지와만 의사소통을 하고,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그리고 작가는 계속해서 남지를 통해 소재를 얻는데 실패하고, 남지는 자신의 삶을 일부 공유해주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렇게 작품 안으로 침투한 작가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를 지면 위에 구현한다. 작가의 내레이션이 적혀 있는 말풍선과 주인공 남지가 상호작용을 이루는 12페이지에서 독자는 작가와 남지의 관계를 재설정하게 되는데, 11페이지까진 남지의 내레이션으로 이해했던 장면이 12페이지에선 ‘작가’의 내레이션으로 변화한다. 이 순간 책 밖에 이름이 적혀있는 ‘지은이 최성민’은 작품 속 세계로 넘어오게 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최성민’과 내레이션의 ‘작가’를 혼동하면서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독자는 작가의 존재를, 작가는 남지의 존재를 불안하게 여기게 된다.


불안의 가능성

작품 속에 침투한 작가는 남지의 꿈을 다룬 두번째 에피소드 ‘모노레일 드림’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번째 ‘2호선은 순환 중’에선 아예 작가가 전철을 멈추거나 하는 ‘전지적’ 능력을 드러낸다. 독자는 ‘작가’의 목소리가 남지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지은이 최성민의 목소리인지 계속 혼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도 만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들을 선보이는데, ‘모노레일 드림’에선 꿈 속 장면의 칸을 물결 모양으로 바꾸어 그리고, ‘2호선은 순환 중’에선 다시 남지를 떠나가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만화에서 ‘목소리’는 물리적 공간을 차지한다. 영상매체에서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전해지고, 인쇄매체인 소설에선 큰따옴표로 표시되지만 만화에선 말풍선으로 그려진다. 어떤 말풍선은 생각을, 어떤 말풍선은 목소리를 담는다. 네모칸 안에 쓰여진 말은 내레이션이다. 이런 약속은 지난 시간동안 독자와 작가가 모두 여러 작품을 통해 학습한 것이고, 최성민은 이걸 이용해 남지가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남지가 자신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작품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남지만이 남는다. 남지는 퇴근하면 “피곤하고 불안해서” 뭐라도 그리고 쓰게 된다고 말한다. “내가 놔버리면 언제든 현실 너머로 사라져 버릴 사적인 꿈”이 “스러질까 애써 붙들어 매는 건 항상 내 쪽”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불안을 가지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남지가 불안을 고백하는 순간은 텅 빈 워드프로세서를 만났을 때다.


남지의 불안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불안감이다. ‘작가’는 “당신 같이 밋밋한 인물로 재밌는 만화를 만들어보겠다는 기대부터 잘못이었어요”(p.108)라고 말하고, “접을래요. 그간 관둬버린 만화가 수두룩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만둘게요. 재미없는 남지 씨”(p.109)라고 힐난한다. 우리는 ‘작가’의 불안을 마주하고, 작가는 남지에게서 떠나간다. 114쪽에서는 ‘작가’의 내레이션과 남지의 내레이션이 교차하는데, 우리는 다시 이 ‘작가’가 최성민인지, 아니면 남지인지 혼동하게 된다.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목소리를 되찾는’ 여정을 그린 뻔한 이야기로 맺을 줄 알았던 작품 속 마지막 내레이션은 “새해 첫날, 남지에게도 작가에게도 뮤즈는 찾아오지 않았다”(p124)는 말로 시작한다. “노래가 들려올 뿐. 평온하다. 어설픈 솜씨로 치닫는 클라이맥스가 여느 때와 같아서 라고.”(p.125)라는 작가도, 남지도 아닌 제 3자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내레이션은 불안의 해소가 아니라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 가능성이 불안의 씨앗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조차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다. 


최성민은 불안을 다루면서 불안을 포장하지도,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저 일상을 사는 자신의 페르소나 ‘남지’와 자신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를 통해 불안이 나타났다가 잠잠해지는, 현실 속 우리의 삶과 의식 사이의 파고를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불안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불안은 마침내 그것을 마주했을 때 잠잠해진다. 다시 불안이 솟구치더라도, 그것을 마주할 수 있기를. 잠시 불안을 잠재우는 순간이 바로 ‘완벽한 순간’이 아닐까.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한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계속 하고 있다.


Text 이재민